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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2218. XX. XX
제3대대에 발령받은 지 이틀이 지났다. 그리고 어제 크리쳐의 습격으로 소대원 4명이 죽었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 미숙한 내가 살아 있는 게 기적이다. 코에는 흉터가 남았고, 머리카락도 좀 잘렸지만. 아침에 내 머리를 정리해 준 미용사가 머리 대신 머리카락만 날아간 게 얼마나 다행이냐면서 농담처럼 위로를 해 줬다. 어쨌든 지금은 능력을 무리하게 쓴 패널티로 한쪽 다리에 마비가 와 하루 종일 의무실 침대에 누워있다. 능력 조절은 자신 있는 분야였는데, 역시 훈련과 실전은 다르구나.
 
죽은 선임들은 성격이 꽤 좋았나 보다. 소령님까지 장례식에 와서 꽃을 두고 간 걸 보면. 크리쳐에게 당해 죽으면 몸이 멀쩡하지는 않을 거라던 말이 진짜였다. 알렌 중사님은 팔다리가 전부 없어졌고, 제나 하사는 머리가 터져서 군번줄로 겨우 알아봤다. 헤즈 상사님과 루이사 하사는 더 처참했다. 가까이서 본 크리쳐는 역겨웠다. 그런데 그 크리쳐에 당해 죽은 사람의 시체는 더 역겨웠다. 죽은 전우의 시체를 보고 토악질을 한 건 나밖에 없었다. 나는 언제쯤 되면 선임들처럼 온전히 죽음을 슬퍼해 줄 수 있을까. 그전에 죽지는 않을까? 감마 섹터에 있다간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 뛰쳐나왔는데, 차라리 거기서 물에 잠겨 죽는 게 더 나았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는 여기서 10년을 버텨야 한다. 아니면 죽겠지. 마비가 풀리면 다시 크리쳐를 잡으러 가야 한다. 너무 무섭고 불안해서 미쳐버릴 것 같아...


 
2218. XX. XX
담배를 시작했다. 이번 주에는 평소보다 더 많이 죽었다. 크리쳐가 연달아 나타나는 바람에 10명이나 전사했다. 거기에는 내 동기, 나이르 하사도 껴있었다
. 언제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불안해서 잠이 안 왔다. 그럴 땐 담배가 도움이 된다고 케네디 대위님이 말해주셨다. 실제로도 제법 괜찮았다. 냄새가 좀 신경 쓰이긴 하지만 흡연자가 대부분이고 괜찮겠지. 적어도 담배를 피울 때는 아무 생각도 안 들어서 편하다. 나중에 내가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 자신이 생긴다면 그때는 끊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지금은 아니란 건 잘 알겠지만.
이제 두 달 뒤면 중사로 진급이다. 저번 주에 진급하고 나면 같이 술을 마시러 가기로 했는데.  그러고 나서 전에 죽은 동기들을 보러 가기로 했잖아. 같이는 못 가지만  나이르가 외롭진 않을 것 같아 다행이다. 다들, 다다음달에 술 사서 갈 테니까 그때 보자.
 
 
2219. XX. XX
탱커라는 직군이 가지는 무게를 깨닫는 나날이다. 딜러나 힐러도 나름의 고충은 있겠지만, 일단 내게 주어진 의무는 탱커의 것이니.  사관학교에서 내가 배운 탱커의 역할은 딜러가 크리쳐를 죽일 수 있도록 공격을 막고 크리쳐를 저지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달랐다. 내가 버티지 못하면 사람이 죽는다.  내가 무섭다는 이유로 공격을 대신 받아내는 걸 머뭇거리면 딜러가 죽고, 대열이 무너진다. 뒤에 있는 힐러와 부상자들도 안전하게 퇴각할 수가 없다. 그래서 탱커는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해서는 안 되는 존재다.
언제나 타인이 먼저. 희생은 당연한 일이다.  내가 이런 능력을 각성한 건 그때 널 지켜주지 못해서일까? 지금의 나라면 리타, 너를 지킬 수 있을까. 이 능력을 준 게 너 대신 다른 사람을 지키라는 뜻이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게. 보고 싶어, 리타.
 
 
2221. XX. XX.
오늘로 꼭 중사 2년 차, 군 생활 4년 차다. 이젠 그럭저럭 여기 익숙해졌다. 담배도 조금 줄었다. 입대 날엔 정말 어렸었는데. 지금도 이런 말을 하면 선임들이 너도 어리다고 면박을 주긴 하지만, 이젠 나도 후임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제법 늘었다. 하사들을 보면 그때의 나 같아서 가만 둘 수가 없다.  그렇게 움직이면 위험한데, 그렇게 하면 나중에 힘들 텐데. 결국 한 명씩 쫓아다니면서 도와주고 있다. 신병 교육 담당이 된 건 썩 나쁘진 않다. 한 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다면 못할 게 뭐가 있다고. 뒤에서 욕 좀 먹어도 제대로 가르쳐줘야지.
 
 
2224. XX. XX.
등에 흉터가 생겼다. 죽을 줄 알았던 크리쳐가 갑자기 꼬리를 휘둘렀다. 채찍으로 두들겨 맞은 느낌이다. 다행히 등뼈는 무사하다. 힐러가 응급처치를 해준 덕분에 통증도 많이 가셨다. 그래도 당분간 치료는 받아야 하니 입원하란다. ...어쩌지. 당장 모레가 휴가인데, 다쳐서 미뤄진 걸 알면 난리가 날 텐데. 이번엔 또 뭐라고 둘러대야 하지. 사실 예전에 생긴 흉터들도 아직 비밀로 하고 있긴 하다. 손바닥은 감추기 좀 힘들긴 하지만, 정복을 입고 휴가를 나가니 장갑을 끼고 있어도 이상하게 보진 않았다. 우선 휴가가 미뤄졌다고 전화부터 해야겠다. 인력난이라 당장 나가기 어려워졌다고 하면 넘어갈 것도 같다. 이러는 동안에도 테오는 또 쑥 크겠지. 곁에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
 
 
2224. XX. XX.
'프로젝트 엑스페디오' 지원자 모집 공고가 붙었다. 이전에 4대대에서 몇 명을 뽑아 아마존으로 보냈다는 건 들어서 알았지만 지원 기회가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 별생각 없이 포스터를 읽는데, 보상으로 섹터 이주가 가능하대서 바로 신청서를 작성했다. 테오를 거기서 빼낼 수 있다니. 죽을수도 있다고들 하지만, 3대대에 자원한 이상 항상 죽음에 한 발짝 가까이 있는 거나 다름없으니 별 문제도 아니다. 죽는다 해도 크게 미련은 없으니 잘 된 일일지도. 좌우간 붙었으면 좋겠다. 


2224. XX. XX.
프로젝트에 합격했다. ...부모님껜 뭐라고 하지? 3대대에 가겠다고 했을 때부터 걱정이 심하셨는데. 아마존은 절대로 안된다고 하시겠지. 하지만 나도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가 없다. 게다가 이미 붙었으니 무를 수도 없고. 돌아와서 사실대로 말씀드려야겠다. 만약 거기서 죽는다면... 조금 죄송하긴 하지만, 그래도 후련하게 떠날 수 있겠지. 사망 보상금이 충분하려나 모르겠다.
+) 합격 사실을 제이드 소위님께 말씀드렸더니 소위님도 프로젝트에 참여하신다고 했다. 소위님도 함께 가신다니 안심이 된다. 적어도 살아서 돌아올 수 있겠지. 소위님께선 믿을만한 사람이 벌써 둘이나 있어 기쁘다던데, 한 명은 나라고 하면 다른 한 명은 누구지?


2224. XX. XX
아마존 한복판에 물도 식량도 없이 떨어졌다. 시작부터 저런 미친 크리쳐와 마주치다니. 아마존에 제2의 오티움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은 접는 게 좋을 거다. 당장은 가진 것도 메모지 정도고, 펜 잉크도 거의 다 되어가니 기록은 잠시 멈춰야겠다.


호수 건너 헬기

이 지옥 같은 땅...



2224. XX. XX.
물자를 찾았다. 그새 제법 많은 일이 있었다. 조난당해서 굶어 죽기 직전에 겨우 살아나나 했더니, 이젠 오카수스가 없단다. 어쩔 수 없이 피를 쓰자고 결론이 났다. 헌혈이야 어려울 것도 없지만 레페로는 입장이 또 다르겠지. 유독 심란해 보이는 사람들이 몇 명 있다. 헥스 상사도 많이 불안해하고, 알데르 대위님은... 그런 표정은 처음 봤다. 내가 누군가에겐 괴물이 될 수 있다니. 그동안은 혼자 살아남기도 바빠서 생각도 못했는데, 오리진을 괴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구나. 그렇잖아도 녹스 원사님도 비슷한 말을 했다. 나중에 알파 섹터에서 교육을 받은 테오가 날 오리진이라는 이유로 싫어하게 되면 어쩌지... 그래도 나는 그 애를 사랑하겠지만. 역시 그동안 못 해준 게 마음에 걸린다. 돌아가면 휴가를 써야겠다. 2주 정도 같이 지내면 조금 나아지려나. ...보고싶어.


2224. XX. XX
이젠 뱀은 꼴 보기도 싫다. 일단 오카수스를 찾긴 했지만, 아무튼. 뱀은 싫어. 부상자가 많아서 일이 늘었다. 그래도 사망자가 없으니 다행이다. 우선 지금은 거기에 만족해보려고 한다. 저 멍청한 로봇이 구조 요청을 할 줄 안다면 더 좋겠지만. 뻑하면 울기나 하는데 상부가 왜 저걸 같이 보낸 건지 모르겠다. 그나마 보드카나 먹을 걸 주워다 준 게 유일한 쓸모였다. 먹을 거 하니 전에 나나 하사가 만든 수프가 생각났다. 날호람쥐로 만들었다던데... 그런 건 처음 먹어봤다. 그걸 그대로 들고 다니던 헥스 상사도 참... 여러모로 걱정이다.


2224. XX. XX
최근 일기 내용이 너무 우울한가 싶어 가벼운 이야기도 몇 개나마 써보려고 한다. 아마존에서 웃은 일이 아주 없던 건 아니었으니까.
우선 여기 와서 친해진 사람이 늘었다. 현 인원 중 3대대 출신 대원이 절반 정도 되는데, 얼굴은 알았어도 같이 지낼 틈이 없었던 사람들도 많았다. 조난당해서 계속 붙어있다 보니 더 친해진 것 같기도 하다. 다른 대대 사람들도 만날 기회가 생겨 좋았다.
어제는 크리쳐 도감을 다시 읽다가 한참을 웃었다. 다들 상상력이 전부 작명 센스로 간 것 같다. 크롱웰에 건방쥐, 냉랭돌이라니. 다음엔 또 뭐가 나오려나.  크롱웰을 솔직히 제법 잘 어울린다. 냉랭돌도 좋지만 제이돌도 좋았는데. 이 이름을 상부에 보고해야 할 소령님께 미리 경의를 표한다. 
아까는 3대대 빨간 머리들에 대한 고찰을 해봤다. 역시 특별 훈련을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특히 니코 하사가 조만간 영창에 갈 것 같다. 한 번쯤은 다녀오는 게 나중을 위해선 좋을지도. 하가덴 중사도 만만치 않다. 상관 무덤을 파는 하관이라니. 나한테만 대드나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유독 하가덴 중사가 뭔갈 하면 묘하게 더 열받는다. 돌아가면 제대로 가르쳐 둬야지.


리타... 미안해. 아무것도 못해줘서 미안해. 내가 너 대신 죽었더라면 넌 살아있었을 텐데... 이 능력을 네가 준 거라면, 나는 기꺼이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어. ...보고싶어...


 

2224. XX. XX.
말하는 크리쳐라니. 들어 본 적도 없다.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써야 할지도 모르겠어. 릴리, 크리쳐, 진짜 같은 환각. 사람이, 크리쳐로? 내가 드디어 미쳐버린걸까? ...만약 내가 변이 한다면 어쩌지. 그전에 확실하게 죽어야 할 텐데. 권총이라도 가지고 올 걸...


2224. XX. XX.
1차 선발대 중 생존자를 찾았다. 이름은 칼리 로페즈, 오르투스 레페로, 4대대 출신. 생존자가 있단 건 기쁜 일이지만, 하는 말은 믿기 어렵다. 레페로가 변이한다니. 왜? 괴물은 우리인데, 레페로가 변이한다고? 오카수스나 오리진의 피의 부작용일까? 아니면 크리쳐를 먹어서? 헛소리라기엔 이전에 만난 릴리도 레페로용 군번줄을 손목에 감고 있었는데. 칼리는 왜 멀쩡한 거지? 생각이 하나도 정리가 안된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미쳐버릴 것 같아.  요즘은 명상도 소용이 없다. ...담배 피우고 싶다...


2224. XX. XX.
곧 구조대가 온단다. 드디어 그 깡통 로봇이 일을 제대로 했나 보지. 모두 살아서 돌아갈 수 있어 다행이야. 돌아가면 바로 이사 준비를 해야지. 테오는 예술학교에 입학 시키고 싶은데, 간 김에 그것도 좀 알아봐야겠다. 아무래도 좋지만 지금은 부모님께 많이 혼날 것 같아서 벌써부터 걱정이다. 놀라서 쓰러지시진 않겠지?


제이드 소위님이 죽었다. 커티스 중령님과 알데르 대위님, 이비 하사도. 군번줄도, 시신도 전부 이능력 연구소가 가져가버렸다. 시신도 없는 장례식이라니. 따라갈 사람이 없어졌으니 3대대에 쭉 남을 생각이다. ...나는 언제쯤 죽을 수 있을까. 같이 사지에 뛰어들어도 항상 나만 살아남는다. 그게 너무 싫어. 차라리 그 사람들 대신 내가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죽고 싶어...